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80) 리싸이클링 예술가 서진옥 “쓰레기, 너는 생명을 지녔어.”
수정 : 2018-11-15 19:07:54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80) 리싸이클링 예술가 서진옥
“쓰레기, 너는 생명을 지녔어.”
흔히들 빛으로 소금으로 혹은 아우라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 희망사항이다. 그리 살고 있지 못해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리사이클링 작가 서진옥의 작품과 그가 말로 하지 않아도 존재가 뿜는 빛 속에서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쓰레기, 너는 생명을 지녔어.” 쓰레기를 예술로 부활시켜 환경과 생명을 살리려는 사람. 서진옥 작가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생 1막 : 죽이지 않은 신의 뜻
그는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1950년 2월에 태어났는데 6월에 전쟁이 났다. 인민군이 쏘는 총을 피해 야반도주 하는 배가 있었다. 그 배에는 애들을 절대로 태우지 않았다. 시끄럽게 울어서 걸리면 배에 탄 사람이 전부 죽으니까. 그런데 그는 탈 수 있었다. 엄마는 아기가 울면 바다에 빠뜨리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 뒤웅박 같은 아기가 어찌 죽지 않고 살았을까? 이 갓난아기는 배에 타자마자 잠들기 시작해서 인천 앞바다에 도착해 내리니까 그제야 깨서 오줌을 한바탕 싸고 낑낑거렸다.
“하늘이 나를 환경운동 하라고 살렸나봐. 그런데 애 둘 낳고 아줌마 될 때까지 사회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어. 그저 연애나 했지 뭐.”
인천에서 쭉 살다가 대학을 서울로 가서 남편 신중현(현. 교회 목사)을 만나 딸이 둘이다. 고등학교 음악교사 부인으로, 딸 둘 엄마로 5년을 평범하게 살았다. 그런데 남편이 함석헌 선생님에 빠져서 갑자기 신학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뒷바라지하기 위해 칼국수 장사를 했다. 망했다. 사골을 푹 고아내고, 닭도 푹 삶고 거기에 멸치를 넣어서 삼합이 된 국물에 각종 싱싱한 야채를 넣고, 힘이 좋아 국수는 손으로 벅벅 밀어서 한 2년 장사 했다. 칼국수 잘 만들 생각만 했으니 남는 게 없었다. 그러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빵 가게를 했다. 코끼리제과점. 이 장사도 빵 굽는 기술자들에 의지하다보니 망했다. 남편은 어떻게 하면 돈을 까먹는 건지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라 했다.
“난 계산을 잘 못해.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그냥 믿어.”
▲이 모든 것은 쓰레기통에서 나왔어요. 자료사진 뉴스 경남
인생 2막 : ‘달팽이집’을 나와 공해문제에 뛰어들다
그의 남편은 함석헌 선생을 만나 인생을 바꾸어 목사가 되었다. 서진옥님은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을 읽다가, 신문에 ‘주부아카데미’를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강원용목사의 강의를 들으러 여주에서 장충동까지 3개월 내내 빠지지 않고 버스 타고 다녔다. 버스에서 오가며 꼼꼼이 메모한 것을 복습하고, 집에 와서는 남편에게 강의를 했다. 그는 강원용 목사의 강의를 듣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역사의식, 사회의식, 개인의식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야! 정말 혜안이다 싶었다. 가슴에 불길이 일어 스파크가 팍팍팍 튀었다. 그때가 79년도였다. “그때는 여성문제의식이 희박했어. 가기 전에 남편한테 책잡히지 않으려고 반찬 다 해놓고 집안 살림 다 해놓고 갔어.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 너도 해, 너는 손이 없냐? 하지. 하하”
첫 강의는 ‘여성의 인간화’였다. 그때 가슴에 꽂힌 두 마디는 지금도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고 했다. 하나는 여성은 온전한 인간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는데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못살도록 반 토막이 난다는 것이다. 여성을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서 여성을 집안에 가둔다. 여성이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워야 이 세계는 완벽하게 된다는 것이다. 눈물이 펑펑펑 쏟아졌다. 두 번째는 ‘여성이 자기의식을 되찾았으면 탯줄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강의를 들을 때는 “그래 맞아, 내가 새롭게 살 거야” 결심하지만 다시 가정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강원용 목사는 이를 달팽이처럼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여성들이라고 비유했다.
▲세상을 떠난 정신대 할머니들의 고통을 표현한 작품
3개월간의 아카데미를 끝내고 그는 여주에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50여명을 모아, 5번쯤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으로 강목사가 잡혀 들어갔다. 불온서적 읽는다고. 그는 조사만 받고 나왔지만 회원은 15명으로 줄었다. 그래도 남은 회원으로 교육을 끝까지 진행했다.
남편이 신학대학을 마치고 서울 산성교회에 전도사로 갔다. 자신은 크리스천아카데미의 간사가 되었다. 열심히 일했다. 1년에 두 번씩 교육생 배출하는데 4년 하니까 3백 여명의 교육생이 나왔다. 이 교육생들이 교육이 끝나 또 달팽이집으로 들어가는데 안되겠다 싶어서 소그룹을 만들었다. 5개의 소그룹으로, 환경공부하는 모임, 기생관광 여성 매춘 문제를 연극으로 하는 둥우리 모임, 드라마 모니터 모임 등.
이중 둥우리모임은 기생관광 문제와 정신대 문제를 같이 다룬 ‘이 세계 절반은 나’라는 연극을 만들어 단성사에 올렸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기생관광을 은연중에 조장했기에, 이 연극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크게 보도되었다.
환경그룹에서는 4대 일간지에 나오는 환경기사를 스크랩 했다. 폐수 방출, 대기오염, 핵발전소, 식품문제 등을 스크랩하니 일 년에 천 건 이상 나왔다. 그러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이 생겼다. 서진옥님은 이 그룹의 리더로 환경문제에 몰두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운동단체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를 만들었다. 당시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운동단체에서 환경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환경문제는 하느님이 만든 생명을 떼로 죽이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묵과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단체를 만들어 한 활동은 공해고발전화를 받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이 문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환경 관련 7가지 소책자를 만들어 전교조와 연합하여 배포하며 환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렇게 시작한 환경운동의 행보는 밤과 낮이 없었다. 더구나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는 시위와 집회가 자주 열릴 때였다. 당시 여성지도자들 중에 그가 제일 어리고 덩치가 커서 데모하면 매번 앞에 서게되었다. 어느날은 최루탄이 바로 앞에서 터져 도망을 가는데 눈을 감고 뛰느라 전경들쪽으로 뛰어들어, 전경들이 “아줌마, 이쪽으로 뛰지 말아요. 저쪽으로 뛰어요.”라고 코치하기도 했다.
또, 전경에게 잡히면 환경운동가들은 모두 닭장차에 태워 난지도 쓰레기 하차장에 버려놓고 가버렸다. 당시 난지도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깜깜한 그곳에 내리면 걸어서 집에 가곤했는데, 집에 도착하면 새벽 두 시가 넘곤 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안오면 또 잡혀갔나보다 생각했을 정도였다. 환경운동에 빠져서 오히려 아이들이 엄마를 걱정하고, 자신은 아이들 중고등학교 때 도시락도 제대로 싸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 큰 아이들이 “난 그대로 엄마가 자랑스러워”라 말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이섬환경학교 교장으로 교육중인 서진옥 작가
인생 3막 : 리사이클링 예술가로
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시작한 그의 새로운 인생은 환경운동가로 혼신을 다하면서 건강을 망치게 되었다. 단체를 만들었으니 운영비로 쓸 돈을 모아야 하고, 공해고발 현장에도 가야하고, 군부독재 반대 시위에도 참여해야 하고...
“한국에 더 있으면 몸이 아파 죽을 것만 같더라고. 당시 한국에서 환경운동가가 많지 않아 국제회의에 초청되어 사례발표를 하곤 했는데... 느낌에 통역이 내 말을 실감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직접 영어를 해서 한국의 환경 실상을 더 많이 알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한 5년 나갔다 와야지 생각했지.” 그는 그렇게 1991년 1월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갔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91 여성동아대상’을 줬는데 상금 200만원 전액을 환경운동연합에 기부하고 떠났다.
가서보니 캐나다 환경이 너무 좋았다. “사슴패밀리들이 지나가는데 차들이 다 정지하는거야. 그 모습이 어메이징이었어. 하늘은 왜 그리 높고 파란지. 그런 거 보니 좋은 게 아니라 슬펐어. 우리 민족은 무슨 죄를 져서 저런 하늘을 갖지 못하나 생각드니 눈물이 나더라고. 막 울었지. 딱 미친 여자였어.”
캐나다에서 그린피스 토론토 자원봉사활동도 하고, 페이퍼폴 강사자격도 취득했다. 기후변화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재활용 예술에 주목했다. 스티로폼, 비닐, 티셔츠 등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예술작품으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부활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서진옥님. 이제 그는 리사이클링 예술가이다.
2012년 박근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교회에 가면 캐나다 할머니들이 “너네 나라는 어떻게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지?”라며 놀라워했다. 자신도 가슴에 이는 불길을 주체할 수 없어 2012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재활용예술가로, 환경운동가로, 여성운동가로 뛰어다니다가 다시 캐나다로 간다. 재활용예술을 주제로 한 미술교사 연수가 확산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몇 차례의 재활용 예술작품전시회를 했지만, 작품에 집중할 수 없을만큼 바빴던 점이 더욱 아쉽다고 몇 번이고 말한다. 그는 운동가가 아니라 예술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이다.
캐나다에서 리사이클링 예술가로서 더 많은 연구와 작품 활동을 할 계획이다. “퍼블릭라이프에서 퍼스널라이프로 살려고 해. 두 가지 삶 모두 중요하지. 그동안 퍼블릭라이프는 최대한 해왔으니... 이제 자연과 함께 퍼스널라이프에 좀 더 신경을 쓰려해.” 이제 파주시민의 자리를 두고, 캐나다로 떠나는 재활용예술가. “음악이 담은 영성에서 힘을 받는다”는 그를 재활용예술 전시로 다시 맞을 날이 곧 오리라는 확신을 하며 이별의 악수를 했다.
허영림 기자
▲서울시민청 갤러리에서 아이들과 재활용 예술 체험 후
서진옥
1982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 간사
1986 한국 공해반대 시민운동 협의회 설립(의장)
1988 한국 공해추방운동연합 창설(공동의장)
1991 동아일보 제8회 여성동아대상 올해의 여성상 수상
1991 캐나다 이주
1993 그린피스 토론토 자원봉사
2010 페이퍼폴 강사자격 취득
2012 개인전 “Paverpol” Art, 인사동 트렁크갤러리
2013 제10차 WCC(World church council)총회 초대작가, BEXCO, 부산
2014 서울시 재활용 예술작품전시회 ‘쓰레기와 소풍가기’
2016 논밭갤러리 ‘쓸모를 이야기하다’
2017 경주시 제14차 세계유산도시기구총회 ‘쓰레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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